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브랜드나 서비스에서는 일하기 쉽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에요.
이미 강력한 브랜드 관성이 쌓여 있고, 조직은 검증된 성공 공식을 여러 번 돌려본 상태죠. 예산은 넉넉하고, 작은 실수는 대개 묻히거나 오히려 ‘학습’으로 포장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평범한 아이디어만 던져도 평균 이상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반대로, 아직 관성이 거의 없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상황은 정반대예요. 아무리 좋은 전략을 가져와도, 조직 구조가 비효율적이고 고객 인식이 이미 기울어져 있다면 그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성공 브랜드에서 통했던 방식이 여기서는 똑같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수없이 봤어요.
제 커리어를 돌아보면 극명하게 두 세계를 오갔습니다.
WPP Media 에서 P&G, L'Oréal, Red Bull 같은 글로벌 고객사를 맡았을 때는 ‘잘 되는 관성’ 한가운데 있었어요. 뛰어난 팀, 충분한 예산, 이미 사랑받는 브랜드 이미지가 바탕이 되니 제가 한 시도 하나하나가 비교적 쉽게 성과로 연결됐고, 자연스럽게 탄탄한 시스템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환경이 자동으로 성공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막대한 자원과 강력한 브랜드 에쿼티를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배분할지, 그 자원을 통해 어떤 레버리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가 진짜 차이를 만들어냈어요.
예를 들어 Red Bull처럼 마케팅 예산의 25~30%를 극한 스포츠 스폰서십과 콘텐츠 경험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으면서도, 그 자원을 단순히 '쓰는' 게 아니라 브랜드 세계관을 확장하고 카테고리를 새로 창조하는 방향으로 정교하게 레버리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P&G나 L'Oréal에서도 마찬가지로, 방대한 R&D와 미디어 예산을 소비자 인사이트에 기반해 최적화하고, 브랜드별로 자원을 전략적으로 재배분하는 시스템적 접근이 성과를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 핵심이었죠.
이런 환경에서 쌓은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에 대한 실전 감각과 노하우는, 지금도 제 작업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력 초·중반에는 거의 정반대 환경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Expedia Korea를 담당했던 때입니다. 한국 시장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콘텐츠 마케팅 방향을 새로 잡아야 했고, 주어진 시간은 고작 6개월. 인지도는 바닥이었고, 프로모션 중심 구조를 국내 고급 호텔들과의 제휴로 바꿔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려야 했죠.
문제는 그게 이미 실패한 레시피라는 점이었어요. 국내 유명 에이전시 세 곳이 똑같은 방식으로 좌절한 전례가 있었거든요. 여행 고객 행동이 ‘탐색과 검색’에 집중되어 있다는 걸 놓치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저와 동료 Alysa, Simpson이 함께 2개월 동안 미친 듯이 실험하고 데이터를 들여다봤습니다.
특히 Alysa는 날카로운 데이터 분석과 인사이트로 팀을 이끌었어요. 그녀의 가장 큰 강점은 고객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탁월함이었죠. 숫자와 행동 패턴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를 정확히 짚어내서,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방향타를 잡아줬습니다.
반면 Simpson은 디지털 환경에서 콘텐츠와 프로모션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구축하는 데 타고난 강점을 발휘했어요. 프로모션 아이디어, 콘텐츠 방향, 커뮤니케이션 톤까지 여러 관점에서 쏟아지는 제안들이 끝없이 나왔고, 그 덕분에 Alysa의 인사이트를 실제로 테스트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연결됐습니다.
그의 이런 능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현재 Simpson은 리텐션 회사를 리드하면서 스타트업 환경에서 Growth 마인드를 확장해가고 있고, 연이어 성공 케이스를 만들어내고 있죠. 그의 확장성은 정말 무한하다고 느껴집니다. 두 사람의 조합이 없었다면 그 짧은 시간 안에 검색 트래픽을 신규 고객으로 전환하는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을 거예요. 정말 고마운 파트너들이었습니다.
그 경험에서 가장 크게 배운 건, 서비스 자체의 문제점을 건드리지 않고 마케팅만으로 비즈니스를 돌파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여유 있는 싸움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당장 고칠 수 없는 큰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지금 풀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하고, 서비스 쪽 문제는 계속해서 솔직하게 제기하는 게 결국 고객사의 신뢰를 쌓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 제게 들어오는 대부분의 고객사도 비슷한 지점에 있어요.
‘잘 되는 관성’과는 정반대편, 문제와 과제가 산더미인 곳들입니다.
제 이력을 보고 연락 주시는 분들의 공통점은 대개 “문제를 정의하고, 풀 방법을 같이 찾아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같은 고객사 안에서도 담당자마다 태도가 크게 갈린다는 점입니다. 그 차이는 거의 100% 그 사람이 이전에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로 설명됩니다.
- ‘잘 되는 관성’ 속에서 커리어를 쌓은 사람 → 빠른 실행, 과감한 의사결정, 성과 중심 사고가 자연스럽습니다.
- 반대로 ‘문제를 풀어야 했던’ 환경에서 일해온 사람 → 맥락 이해, 작은 실험의 반복, 조직 내 정치적 균형 감각이 훨씬 예민합니다.
두 부류가 만든 성과는 ‘결’ 자체가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변화 속도가 미친 듯이 빠르고, 불확실성이 기본값이 된 시대에는 후자 쪽 경험이 훨씬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어떤 환경에서 어떤 문제를 실제로 풀어봤는지가 점점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1~2년 사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토스 출신’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토스라는 압도적인 관성 위에서 나온 리더들이 다른 조직(특히 기존 거대 플랫폼)으로 옮겨갔을 때 벌어지는 일들이죠. 같은 방식, 같은 속도, 같은 자신감을 그대로 적용하려다 오히려 충돌하고, ‘오만하다’ ‘맥락을 모른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현상을 단순히 ‘토스 문화가 문제다’로 보지 않아요.
오히려 ‘잘 되는 관성’에서 나온 성과와 ‘문제 속에서’ 나온 성과는 적용할 수 있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사례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잘 되는 조직의 성공 공식은 그대로 복제되지 않는다.
진짜 필요한 건, 망가진 판을 다시 짜본 사람의 눈과 손이다.
변화의 속도가 모든 규칙을 집어삼키는 지금, ‘문제 속에서’ 살아남고 성장한 경험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경쟁력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잘 되는 관성’ 한가운데인지, 아니면 문제와 과제가 산처럼 쌓인 전장인지, 그 차이를 정확히 인지하는 순간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됩니다.
